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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사례
제목 | 중독, 우리 중독자들이 풀어야할 과제 -천 원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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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저주를 받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20여년을 잘 못 살았다. 우리 집은 중소도시의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어려비 않았다. 부모님도 열심히 생활하셨다. 아버지는 매우 자상하셨고 정말로 열심히 일하셨다. 아들인 나는 아버지가 무척 존경스러웠다. 그런 아버지가 스무 살부터 시력이 떨어지더니 30대 중반에는 빛만 볼 정도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어린 나는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아버지와 같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또 한편으로는 저 위에 계신 아니 지금은 내 어깨 위에서 항상 나를 위로하시며 돌보아주시는 그 분을 원망도 많이 하였다. 아니 원망을 넘어 사탄이 나의 우상이라며 사탄을 숭배하였다. 나는 친구들과 못된 짓만을 골라서 저지르며 그렇게 악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댔다. 우리 집의 옥상은 동네 선후배들의 모임의 장소였다. 학교가 끝나면 항상 20~3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거기에서 다양한 모의가 이루어졌고 실행되었다. 우리는 패싸움도 많이 했고 다른 학생들의 돈을 갈취하기도 해, 숱하게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몇 년 선배의 꼬임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하였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가지 않고 선후배들과 놀다가 2-3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한번은 가출을 하여 잠잘 곳을 찾아 교회에 들어갔다가 한 목사님을 만났었다. 그 목사님의 권유로 여름 성경학교에 다니는 잠깐의 신앙생활도 했지만 계속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시력을 잃은 아버지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렸다. 아니 내가 바로 불량청소년 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함께 가출했던 선배들과는 계속 어울렸다. 우리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잘 오르지 않는 ‘삐딱산’이라는 곳이 있다. 선배와 친구들이 또래들의 돈을 빼앗아 막걸리통과 본드를 사서는 산에 오르곤 했다. 선배들은 막걸리를 다 마신 다음에는 그 통을 이용하여 본드를 하였다. 자연적으로 나도 하게 되었다. 한 달에 2-3번 정도 그렇게 했다. 아마도 다른 큰 뜻 없이 일탈행위를 즐기는 그런 정도였던 것 같다. 이렇게 3년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함께 본드를 불던 한 친구가 집에서 본드를 불다가 독극물 흡입이란 죄명으로 경찰서에 들어갔다. 이후로는 약물의 종류를 본드에서 부탄가스로 바꾸었다. 한번은 부탄가스를 살 돈이 없어서 남의 집 옥상에 올라가 LPG가스통을 호스에서 분리해서 들이마신 적도 있었다. LPG가스로 그리 기분 좋았던 기억은 없고 기절이 전부였다. 그러곤 두 번 다시 가스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또 다른 약물인 러미라를 먹으면서 내 인생은 약물이 주는 쾌락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약물을 했지만 부모님께는 한 번도 들킨적이 없다. 20살에 집사람을 만나, 약 2년 정도 집사람과의 사랑에 빠지면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분가하면서 부모님이 방이 3개인 아파트를 주셨다. 집사람과의 단란한 가정생활을 꿈꾸었으나 친구들의 잦은 왕래로 그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당시 친구들은 방위를 받거나 백수건달들이어서 우리집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보통 2-3명의 친구들이 한번 찾아오면 기본이 일주일씩 묶었다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에 이런 일들로 집사람과도 많이 다투기도 했으나 친구들이 그냥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친구가 러미라와 대마초를 동시에 하면 그 쾌락(홍콩)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에 혹해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친구의 자취방에서 러미라와 대마초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23살 때였다. 그러기를 2-3년, 한 친구가 필로폰을 구해와 같이 했다. 그 때의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빨리 해보고 싶은 설렘, 미지의 세계를 빨리 가보고 싶었다. 첫잔을 했을 때의 그 기분, 지금도 기억이 떠오른다. 이 기분의 기억 때문에 내가 평생을 고통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약물을 하다가, 20대 중반 즈음, 선배의 요청으로 지방으로 마약을 받으러 갔다 오다가 잠복하고 있던 경찰에 잡혀 1년6월의 징역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선배를 잘 못 만난 것에 대해 후회만 했었다. 약물을 끊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출소한 다음, 또다시 33일 만에 구속되었는데 이번에도 친구의 작업에 걸려든 것이었다. 3번째와 4번째 구속 때에도 선후배들의 작업에 걸려든 것이었다. 정말로 마약을 하는 놈치고 믿을 놈이 하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마약에 취해 교도소를 전전하는 동안, 집사람은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이 다했다. 2번째 교도소에 있을 때까지 면회를 왔던 집사람도 3번째부터는 발을 끊고 편지만 주고받았다. 집사람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였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청구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집사람은 “네가 나한테 힘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그런 헛소리를 한다.”고 꾸짖었다. 그런데도 또 출소하여 다시 구속되었다. 4번째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 판사에게 “진짜로 약물을 끊고 싶습니다. 치료받고 싶습니다. 정말로 혼자서는 끊을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 덕분인지 치료감호처분을 받았다. 치료감호소에서 나오면서 주치의 선생님이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조언하였다. 그 조언대로 대전갱생보호소에서 머물면서 1주일동안 대전시 동물원 건설현장에서 전기드릴 작업을 했다. 그 장면이 KBS에 찍혀 방송된 것을 우연히 사촌동생이 보게 되었다. 당시 사촌동생은 영종도의 인천공항 건설현장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동생 밑에서 전기기술을 하면서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약물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보냈다. 약물을 끊을 수도 있고 더 이상 약물과는 관계없이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아니 약물이라는 생각자체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 때문인지 고향의 지역방송국의 전기 기사로 입사했다. 열심히 회사생활을 했다. 과거 내가 약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1년6개월 정도가 지날 즈음, 회사의 동료 몇몇과 밤낚시를 가게 되었다. 낚시터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 동료들은 대마초를 피웠다. 이 친구들은 교도소에 간 적은 없었지만 어울려서 대마초를 피워 온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나는 다시 대마초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한 달에 한 번씩 피우던 대마초가 1주일에 한 번씩으로 횟수가 늘어갔다. 그 해 추석연휴에 회사 동료의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던 중, 한 친구가 필로폰을 내놓았다. 중국에 가서 필로폰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함께 하였다. 7년 만에 하니까, 이제까지 하지 않고 참았던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게 보이던지.... 내 자신을 자책하면서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내 생각에도 돈이 들어갈 일도 없고 마약을 대줄 상선도 필요 없지, 그러니 매우 안전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 친구가 자신의 선배에게 주어 모두 경찰에 잡혔다. 판사는 오랜 단약기간을 인정해 보호관찰명령을 내렸다.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더 이상 한국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집안어른의 도움으로 출국하기 위해 수강명령에 따른 약물교육을 빨리 받고자 했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1주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내 귀에 교육이 들려오지 않았다. 교육이 끝나 집에 머물면서도 약물에 대한 욕구는 잠재워지지 않았다. 집사람과 상의한 다음, 송천재활센터에 입소하기 위해 혼자 찾았다. 입소하기 직전에 그래도 아빠라고 집에 전화를 해서 큰 아들과 통화했다. “아들아. 아빠가 없는데, 사고치지 말고 엄마와 동새을 잘 이끌고 보살펴다오.” 아들 왈, “제발 아빠나 사고치지 마세요. 집 걱정은 마세요.”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순간, 벽돌이 내 머리를 내려치는 줄 알았다. 아---- 그것이 단약하고자 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이야. 그러나 송천재활센터에서의 회복노력은 쉽지는 않았다.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함께 생활하던 한 친구가 열심히 기도하면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친구는 정말로 모범적으로 생활하였다. 저 친구도 하는데 나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힘들었고 계속 유혹과 회의가 찾아왔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며 노력했다. 또한 나와 같이 중독자였다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목사님이 약물이 생각날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웠는데 신기하게도 약물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외울 것을 권했다. 이 말씀에 따른 나는 사도신경을 외우며 약물의 생각과 유혹을 나를 괴롭힐 때면 지금도 몇 번을 외웠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면 신기하게도 약물의 생각이 없어지고 새로운 마음과 다짐을 하게 된다. 너무 고맙다. 고맙습니다. 회복을 위한 공동체 생활과 종교생활을 통해 나는 서서히 변해갔다. 지금은 약물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하고 싶다는 생각자체에도 환멸하고 짜증이 난다. 거의 약물생각은 나지 않는다. 마약으로 안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앞으로 더 많이 변해야 하지만 더욱더 변할 수 있고 변하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지나간 과거를 회개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송천재활센터에서 봉사하는 생활을 통해 참으로 많이 변한 내 모습을 본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니 진심으로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렇게 살아가길 노력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어떤 저명한 박사님들도 밝히지 못한 중독. 그것은 우리들 중독자들이 풀어야할 과제라고. 중독자들이 송천재활센터처럼 모여서 단약을 위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면 언젠가 우리와 같은 후배들에게 마약중독자라는 말을 더 이상 들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까지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나의 아내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며 아직은 주님의 가정이 되지 못한 우리 가정을 아름다운 주님의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의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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