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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활)환상의 세계를 벗어나기까지
등록일 2001-03-28
조회 3,431

 

김  선  남 (공주치료보호감호소 일반정신과장)

 
 
저는 29살의 청년입니다. 살아온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기에, 치료나 상담, 또는 재활 쪽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께 제 경험을 비추어 몇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그럼 이제 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다복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기는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가정에는 먹구름이 서서히 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제 나이 10살에 부모님은 합의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의 저와 형은 이혼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는채, 그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 형제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 숙제는 "아빠와 살래? 엄마랑 살래?"였습니다. 형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엄마랑 살래"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은 제 차례였지요. 당시 저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좋았지만, 형과는 헤어지기가 싫었습니다. "난 형 따라갈래" 그 대답을 끝으로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떠나 또다른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느끼는 어려움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집에 놀러 가면 보게 되는 친구의 부모님들… 그때마다 왜 우리집은 아버지가 함께 살지 않는걸까? 라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가슴속에 작은 불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없이 형제를 키우기 위해서 어머니가 택한 일은 유흥업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시는게 너무 싫었고, 술과 웃음을 팔아 버는 돈으로 먹고, 공부한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엄마, 이런 일 안할 수 없어? 하지마라! 응", "다른 엄마들은 시장에서 배추도 팔고, 김밥장사를 하면서도 잘만 살던데 이제 술장사는 그만해" 제가 그런 말을 할때면 어머니는 항상 "속 모르는 소리하지마"라며 말을 막으셨습니다.
  불만 속에 하루, 하루를 지내던 어느날. 그런 불만들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흔히들 청소년기에 허파에 바람이 든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역시 TV탤런트가 되고 싶은 생각에 어머니 몰래 시험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운좋게도 합격은 되었지만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용기를 내 고백을 했지만, 어머니는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엉뚱한 짓이냐, 안돼!"라며 제 작은 꿈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공부는 왜 하나?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건데,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하면서 공부는 해서 뭐해!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저와 어울릴만한 아이들이 있을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에는 의외로 공부와 담을 쌓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준이 틀리다는 이유로 절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저는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셨습니다. 학교에서는 점점 문제아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오히려 그런 것을 즐기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제가 왜? 그렇게 되어 가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선생님도, 주변의 어른들도… 그러던 어느날 동네 선배들이 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한 선배의 집앞에서 누가 오는지 망을 보는 거였습니다. 2시간이 지나도 선배들이 나올 생각을 안하자 우리는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본드를 불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같이있던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야, 저거 하면 기분 좋아지냐?" 하지만 아이들도 본드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 "좋아" 그때의 호기심이 제 삶을 그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며칠후 저와 친구들은 본드 4∼5통을 사가지고 산으로 갔습니다. 사용방법도 몰랐지만, 선배들이 하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어 냄새를 맡았는데, 그때 느꼈던 기분은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았고, 아버지가 없어서 느꼈던 불만과 어머니에 대한 불만도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후로는 계속해서 본드를 찾게 되었습니다. 현실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본드를 하면서 느끼는 그 환상의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일주일이면 5∼6일은 취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와 친구들은 경찰관에게 적발이 되었습니다. 본드에 취해있던 저는 경찰관을 폭행했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철창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 가게된 소년원이라는 곳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러나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저도 차츰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죄를 범하고 함께 생활하게 되는 소년원생들. 저는 18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통해 3가지를 배워 사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본드가 없을때 휘발유 냄새로 환상을 즐기는 것, 두번째는 자동차에서 휘발유 빼내는 방법, 세번째는 열쇠없이 자동차 시동 거는 법. 하지만 어머니는 제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한때 친구들을 잘못 만나 실수를 한 것이고 이제는 잘할 것이라는…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기대와 믿음에 저는 또다시 상처를 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고, 누구하나 따뜻한 관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고, 주위에서 한두명씩 떨어져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제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또다시 본드냄새를 맡으며 그런 것들을 잊으려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신을 자책하고 정신적으로 학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약물을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당장 오늘 죽게 될지, 내일 죽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냥 순간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게 현명한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가면서… 점차 중독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중독에 대해서 말을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물사용은 멈추지를 않았고,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교도소 출입이 빈번해졌습니다. 격리된채 생활을 하게 되면 자유가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뿐, 몸이 망가지는 것이나 삶이 파괴되어 가는 것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8년이 넘는 수용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다짐을 하고 계획도 세워봤지만, 모두 실패했던 것은 전과자라는 낙인과 진정으로 제게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렇게 재범, 재발을 반복하면서 공주치료감호소엘 가게 되었습니다. [약물병동]에 들어한 저는 너무나 값진 것을 그곳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14년동안 그렇게도 기다려 왔던 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인정해주고,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저는 미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나이 29살이지만, 사춘기는 작년 10월경에 왔던 것같습니다. 10대에는 본드통에 빠져 지내느라 사춘기를 겪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걸까? 비닐봉지에 얼굴을 묻고 이렇게 살아가는게 내가 내가 바랬던 인생은 아닌데… 이제는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저는 인생을 변하게 만들 정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약물병동 간호사 한 분이 약물남용상담가 과정을 공부중이었는데, 지나가는 듯한 말로 교육원 얘기를 했습니다. "교육원에 가보면 다방면의 사람들이 와서 강의를 듣는데, 경험자는 한사람도 없더라. 미국같은 경우 약물센타의 치료자중 80%가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라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뭔가 빛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바로 이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독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온 삶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 잃어버린 청춘을 위로받을 수 있는 길. 그때부터 이대교육원에 입학할 길을 알아보았지만, 제가 들어갈 자격은 되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생각에 약물병동 병동장님께 부탁을 드려 이대교육원 쪽으로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입학을 하게 되었고, 제 삶엔 처음으로 목표가 생겨났습니다. 중독자에서 상담자로 탈바꿈하는 것,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저처럼 약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단 한 명이라도 구하겠다는 목표가… 현재는 2학기가 시작되어 계속 상담 공부중에 있고, 예수회 신부님과 약물남용 문제가 있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오랜 기간 저때문에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하던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본드의 환상속에 빠져서 인생을 포기하려던 제가 이런 삶을 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겁니다. 14년간의 약물사용을 중단하게 해준 것은 따뜻한 관심과 칭찬, 그리고 너도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치료나 상담, 재활 모두 따뜻한 마음을 잊어버려서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는 중독자, 전과자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진정으로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역시 환상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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