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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독으로 병든 세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
등록일 2003-03-28
조회 3,933

 

기획특집 - 외국의 치료재활 프로그램

 

중독으로 병든 세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
 


“나눔” 심리상담소 장후용 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자원활동가 “송천 팀장”)

 

병이 들기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만...

특히 오늘날의 세대를 가르쳐 중독으로 병든 세대라고들 말한다.

아마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예전이 오늘 날 보다야 더 도덕적이었고 덜 불안한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과거보다 현대가 더 병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동의 한다. 


요즘은 캄캄한 밤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신문이나 뉴우스를 보면 옛날에는 엄두도 못낼 사건들이 지금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류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려주는 친 아버지 어머니를 대낮에 화장실에서 살해하고 토막을 내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 시체를 유기하는가 하면 길가던 유부녀를 봉고차로 납치하고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 벌건 대낮에 떼 강도질을 하는 것은 보통이 되었다. 옛날에는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도 하고 몸도 팔던 것이 이제는 용돈을 벌어 쓰기 위해서 원조교제를 하는 12살 초등학교 소녀에서부터 여중?고생이 있는가 하면 일시적인 즐김을 위해서나 남보다 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멀쩡한 가정 주부가 원조교제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저 아연해질 뿐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예전 보다 살기가 편해지고 문화가 발달하고 지식의 풍요와 물질의 풍요가 있어서 살기가 편리해진 시대다. 하지만 화장실에 앉아 일을 보고 스위치만 누르면 저절로 뒤처리를 다 해주는 물질의 풍요가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불만이 없을까? 몸에 칼자욱을 내지 않고 레이저 수술로 몇 달씩 걸리던 수술이 단 몇시간만에 끝나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서비스 프렌차이즈 산업이 발달하고 첨단 기기를 이용한 각종 생활 편의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파트 담으로 둘러 쌓여 한 달에 한 번 반상회 때나 볼까 말까 하는 우리 이웃들.. 이런 이웃들이 정다운 이웃 사촌이라고 정겹게 느껴지기는 커녕 오히려 해침을 당하지 않을까 무서운 생각이 들때도 있다. 얼마전에 보도된 뉴스를 보면 혼자 앓다 죽어 40일이 지났는데도 서로 모른체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니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놀라운 건 이런 아파트의 벽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마음도 서로에게 담을 쌓고 지낸다는 사실이다. 이웃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자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서로 나누고 돕던 시대에서 나 혼자 잘 살아 보겠다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가진자가 더 욕심을 부리는 시대.. 돈이야 어떻게 벌었던지 자기 있는 것으로 자신의 육체의 만족만을 채우려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였다고 할지라도 각 개인들의 성숙한 내면의 변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우린 이런 불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상스럽게도 바른 것은 아무리 가르쳐도 잘 따라 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잘못된 것은 금방 따라하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가르켜 인간의 죄성이라고 한다.

죄성이란 세상의 주인인 조물주의 법을 어김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 또 그것은 양이 주인인 목자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라는 대상을 떠나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하고 염려가 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하듯이 우리가 본래 그 지어진 뜻대로 살지 못하고 그 주인에게 떠나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염려와 의심과 불평과 불만과 공포가 따라다니게 되어있다. 죄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인간으로써 살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늘 그 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포기하게 만들고 오히려 잘못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자신의 몸을 자해하듯이 함부로 다루고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영혼을 아무렇게나 세상의 어둡고 더러운 곳에 던져버리는 식의 삶을 살도록 부추킨다.

  죄성은 자신의 가치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사회와 더불어 의미있는 일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쾌락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죄성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한 번 잘못을 범하면 그걸 깨우쳐 회개하고 돌아와 바른 길로 가는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죄에 길로 접어들도록 우리를 부추킨다. 죄성은 결과로 인해 사람들이 옳고 선한 일보다 악한 일에 더 열중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즐거움이라고 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유혹은 욕심이다. 욕심은 사람을 유혹하게 하여 탐욕을 갖게 하며 죄를 짓게 한다.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강박적으로 억압 당하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압적이다. 강압적인 사람은 순간적인 즐거움을 위해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세상 이 땅에 사는 동안 재미나 실컷보고나 죽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억압한다.

  만약 자신이 늘 강박적인 불안감에 빠져있다면, 그 억압에서 빠져 나올 수 밖에 없다. 만약 그 억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마음과 육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강박적인 억압과 불안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과감히 죄를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면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항상 불안해 하고 어떤 일에든 염려와 고민과 어두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죄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행동특성을 유심히 살펴 보면, 그 마음의 핵심 감정에는 남을 미워하는 감정과 남을 질투하는 시기심과 그로인한 분노와 우울증과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아마 처음에는 그들도 자신의 잘못된 부분이 죄인 줄 알았기 때문에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적당히 합리화해서 정당화 시키다보니 이제는 아예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양심에 화인을 맞은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죄에 관한한 자신이 아무리 그 일에 대한 합리화를 시켜 자신의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양심의 씨앗과 그 욕구충족간의 갈등 속에서 죄책감의 발로로 나타나는 것은 교만한 마음과 허영심에 시달리며 옳고 그른것에 대한 가치를 분별치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누가 알든 모르든 자기와 관계가 있든 없든 모든 세상과 사람 앞에 부끄러운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뭐가 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TV 드라마 프로만 봐도 그렇다. 세상을 진솔하면서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찾아 보기가 드물다. 그런 정상적이고 로맨틱한 사랑을 그린 인간의 휴먼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수 없다나.. 그래서 그런지 각 방송국 마다 누가 더 폭력적이고 음란한가, 그리고 누가 더 터무니 없이 공상적인 드라마나 프로를 만들어 내는가, 마치 내기라도 하듯이 거의 황당하고 잔인하고 섹시하고 공상적인 프로들을 소개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뿐만이 아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감미롭고 부드러워서는 판이 잘 안나간다고 해서 보다 폭력적이고 원색적인 음악들이 판을 친다.

  대중가요가 -폭발적으로 광란끼를 가지고 있어야 꼭 히트곡을 낼 수 있을까?...부드럽고 따뜻하고 거기에다가 인간미가 물씬 풍기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로는 드라마가 제작 되도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다 외면하고 말까?...유령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나 정치적 폭력을 다룬 드라마가 현실감과 액션을 가지고 등장해야 만이 진정 높은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거기에다 그로 인해 여과 없이 가정으로 흘려드는 폭력적인 모델들이 우리 가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한번쯤 깊은 의식을 가지고 생각한 다음에 실행에 옮겼을까? 결국 그 프로그램의 영향이 우리 가정과 아이들에게 좋지 않게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프로들을 내보냈다면 그것이 바로 죄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기나 할까?

  마약 중독이라고 하는 말은 의학적인 치료의 목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취제나 흥분제나 또는 어떤 심리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는 약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습관적인 약물복용에 의해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마약을 즐겨하거나 중독에까지 이르게 되는 사람들을 살펴 보면 대체로 죄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독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어떤 잘못된 것에 얽매이게 된던가 타락을 하던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잃어 버릴 때 마약을 사용할 확률이 높아지고 또 중독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내가 “송천” 쉼터에서 마약에 중독 되었다가 단약을 하기 위해 입소한 환우들과 프로그램을 함께 하면서 느낀 것은 이들이 마약을 하게 되어 이 곳까지 오게 된데까지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연유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대체로 낮은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마약중독의 문제로 표면에 나타나 보이지만 진짜 문제는 그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그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이다. 어릴적 부모나 또는 가장 가깝게 관계하던 대상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그것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늘 자신은 “별 볼일 없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았고, 그 깊은 마음에 상처가 자신들을 가치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상처 받은 자존심은 열등감으로 이어지고 열등감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은 과도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죄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또 한 이유로는 책임감 없이 무분별한 이 시대의 대중문화에 따른 것이다. 얼마 전 음반을 하나 구하려고 CD 점에 들렸다가 어떤 외국 가수가 부른 노래를 듣고 가사가 좀 이상해서 제목을 물어 보니까 “의식없는 삶”이라고 한다. 그 노래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말이니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외친다. 그 가수의 이름을 확인 해보니까 데스트리온이라는 가수다. 그 뿐 아니다. 오즈본이라고 하는 가수는 “나의 다른 측면”이라는 노래에서 “인생이 괴로울 때 자살이 최고”라고 노래를 부른다. 이 시대의 노래들이 죽음을 부추키고 있다. 난교를 찬양한다. 마약을 권한다. 폭력을 미화시키고 살인과 자살을 강요한다. 인터넷의 성인 사이트들은 무절제한 섹스를 미화하고 있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강제로 올라오는 게시판 광고에서부터 아예 개인 이멜일에 까지 섹스 광고가 판을 쳐도 정보 통신부에서는 외국에 사이트를 개설해 놓고 돈이 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짓을 하니 어쩔 수가 없단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먹는 것과 성욕구이다. “사흘 굶어서 남의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 없다” 는 우리나라 옛 속담도 있듯이 배고프면 먹어야 해결된다.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치는 것도 죄이지만 대개가 관대한 처벌을 받는다. 먹는 욕구 만큼 인간의 성욕구도 만만치가 않다. 먹는 욕구가 해결되어 등따시고 배부르면 성욕의 충동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음식을 구하듯이 아무나 성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성을 충동질하는 이 시대의 문화는 성에 가장 민감한 청소년들을 약물에 의존하여 없는 용기를 얻어 성욕을 해결하도록 부추키고 있다. “참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세상이다.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가족들이 마약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지 않는다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자! 이런 시대 속에서 내가 살고 있고, 내 가족들이 살고 있고, 나아가서는 내 사랑하는 이웃이 살고 있다고 할때 우리는 과연 방관만 하고 있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이 문제를 다 같이 해결 할 수 있을까?

우리 몸은 내것인 것 같아도 내 것만이 아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해서 서로 하나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속한 것이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자식 또한 출가 하여 독립하기 전에는 부모에게 그 자녀들에 관한 책임이 있다. 형제도 한 몸에서 태어났으니 상관 없다 말할 수가 없다. 나아가서 나의 가족들의 것이기 이전에 국가의 재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나를 만들어 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하나님에 것이다. 인간을 처음 만든 분만이 우리의 구석구석을 안다. 내가 만든 물건이 고장 났을 때 내가 그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있듯이 우리를 처음 만든 분이 우리의 고장난 부분을 고치실 수 있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고칠 수 있는 병은 20%에 불과하다고 미국 의학계에서 보고 한바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고칠 수 없다. 물론 일시적인 방법으로나 어느 한계까지는 사람도 사람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사람의 방법과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이 중독되어 병들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가 과도한 일 욕심 때문에 쉬지 못하고 계속적인 일에 매달리고 때로는 그 육신의 힘들음을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하게 되면서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경우에 있다. 주위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아도 대개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높은 사람을 들기가 일쑤다. 하지만 사람이 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물질과 지위와 명예 뿐만이 아니라 진정 그 물리적인 것들을 어떻게 이 사회와 통합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는데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정신적인 내면의 성숙에 까지를 합해서 이루어야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공이란 행복과 같은 것일 것이다. 성공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게 어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평안에 이르는 것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에 행복은 ‘소유’의 양식에 있지 않고 ‘존재’의 양식에 있는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성공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몸의 육과 영과 혼을 균형있게 이루어낸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전인적인 성숙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인적인 성숙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될 자신도 우리에게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의 육과 영과 혼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 육속에 병이나 영혼 속의 아픔을 고치시기 때문에 그 분을 의지한다면 진정 성공에 대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약물에 중독되어 있다가 단약을 하기 위해 ‘송천 쉼터’에 들어와 있는 입소자들을 우리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대로 그들이 환자이기 때문에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봄직하다. 

죄란 고장나 있는 인간의 결과이기도 하고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 허공 속으로 날아가버린 것과 비교되기도 한다.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온전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앞서 이야기한 이 시대의 죄의 결과는 너무도 커단란 아픔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정신적인 아픔, 육체적인 아픔, 각 가정에 가정적인 아픔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아픔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몫이 남아 있다. 바로 성숙한 사회를 구현해 나갈 자원 봉사 활동가들의 몫이다.
 

Spring 2003 - 아름다운 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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