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마약없는 밝은사회

마약류폐해 없는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 모두의 경각심이
필요합니다.

일반
  • Home
  • 예방자료
  • 간행물
  • 회복사례

회복사례

기본 테이블 상세
제목 약물에 빠진 것도 결국 신의 큰 쓰임을 위해 - 곽명석
첨부파일


   약물을 하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비참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손을 대지 않는 기간이 길수록 자존감이 커졌으나 다시 한 번 손대게 되면 이제까지 쌓았던 자존감이 모두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 손대게 되면 “내가 그렇지”로 돌아갔습니다. 내 자신이 가치 없게 느껴지고 이러다가 죽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본드가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손을 대다.

   나는 막내로 부모와 형 및 누나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성격도 싹싹한 편이었고, 형제 및 부모관계에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21살이 되고나서야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에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전기에 떨어지고 다음해 1월의 후기에도 붙지 못했습니다. 대학을 못 가니 입영이 연기되지 않으므로 군대 영장이 나올 것이 확실했습니다. 입영할 때까지 일할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에 있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우연히 그 곳의 한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카페에는 이미 10대 후반의 동생뻘 4명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동창으로 함께 자취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동생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카페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자취방에서 동생들이 본드 부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본드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되풀이하여 말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카페에서는 말을 잘 듣곤 하였는데 유독 본드 하지 말라는 소리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있으면 하지 않다가도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하는 것 같았습니다.

   본드를 분 후, 이들의 행동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방안에서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이상한 행동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비록 나쁜 것이지만 한번 정도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눈을 떴는데도 환상이 너무나도 선명하였습니다. 의식이 있는데도 보이는 환상은 너무 신기했습니다. 한번 호기심을 충족시키니 자동적으로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한번 정도 손대도 언제든지 하지 않을 수 있다. 성인이므로 하지 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안할 수 있다. 지금은 즐기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생들과 함께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동생들과 자취방에서 본드를 불곤 하였습니다. 􄤨􄤨의 친구도 종종 놀러와 몇 번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했다고 했습니다.(그러나 이 친구는 얼마 후 더 이상 불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발각되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사장과 마음이 맞지 않아 카페 일을 그만둔 후 집으로 돌아와서 불다가 부모님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아마 냄새가 많이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7월 훈련소에 입소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나의 흡입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님은 큰 걱정을 했습니다. 함께 정신병원에 갔지만 그 당시에는 병원도 우리도 치료하는 방법도 몰랐고 단순한 상담만 받고 왔습니다. 다만‘가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것만 알게 되었습니다.

   훈련소에서 4주 훈련을 받은 다음 사단으로 출퇴근하는 방위병이 되었습니다. 퇴근해서는 자주 본드를 했습니다. 집에서도 하거나 집 밖에서 했습니다. 부모에게 또 발각되었지만‘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다음 풀려나면 얼마 후 다시 부는 일을 되풀이 했습니다.

체포되어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 사실을 알다.

   어느 날, 다른 연대의 수영장 임시 PX병으로 파견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방위 1명과 함께 일했습니다. 상사가 가끔씩 들렀기 때문에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좀 늦게 가면 동료가 내 일까지 처리해주었고 동료가 늦게 오면 내가 대신 일을 처리해주었습니다. 차츰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출근을 뒤로 미루게 되었고 결국 동네에서 다시 본드를 하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사단 헌병대로 이첩되어 영창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자대에 복귀하여
18개월의 복무 일수를 채우고 소집 해제되었습니다.

악순환 계속되다.

   이후에도 계속 불자, 가족들은 반강제로 국립서울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당시 서울병원의 입원기간은 6개월이었고 4번 규정을 어기면 강제 퇴원하는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나는 병원에 있으면서도 본드를 계속 하였고 결국 강제 퇴원 당했습니다. 이후에도 단약을 하지 못하고 계속 하여 서른 살까지 흡입, 징역이나 병원 및 집에서의 격리생활을 되풀이했습니다. 20대 때는 주로 병원에 강제 입원했으나 30대 때는 주로 집에서 격리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좀 열린 사람이었지만 보수적인 성향이었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으로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설교하는 형식으로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설교에 반감을 갖는 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의 잘못에 대해 수용하였으나 차츰 잘 듣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해도 결국 또 불곤 하니, 아버지도 짜증이 났고 결국 나를 때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는 때리는 것 자체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지 무관심해졌습니다. 징역도 병원도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격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또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20대 중반 약물을 하고 있을 때에,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작은 형이 울먹거리면서 나를 안아주면서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보여준 기억이 납니다. 형이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매우 슬퍼하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비참해지니까 짜증났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는 다시 형에게 짜증을 내고 하던 일도 있었습니다.

본드만 한 이유와 폐해.

   나는 환경 때문인지 체력이 약해서인지, 경제력 때문인지 1박2일 이상 약물에 취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갈수록 내성 때문인지 기쁨과 즐거움도 전혀 없었습니다. 밖에서 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걸리면 다시 제재 받게 되고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띄엄띄엄 1박2일 정도씩 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동안 하다 보니, 몸이 곯아서 식은땀을 많이 흘리게 되었고 기운이 많이 빠지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체력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약을 먹어보았어도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나는 병원과 교도소를 통해 다양한 약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러미라’라는 약을 배워서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 약을 사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기 때문에 귀찮아서 잘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전환되면서 판매상이 없어지자 가격이 급등해 결국 자연스럽게 손을 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도소를 통해 새로운 약물을 접할 기회도 많았지만 히로뽕 등은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히로뽕을 한 사람 중에 행복한 가정을 이룬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도소에서 가정을 깨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히로뽕을 했던 사람들과의 선은 가능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단약의 끈을 잡으나 또 무너지다. 
 
   20대 때 10개월 정도 회사생활을 한번 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본드를 불면서 20대를 낭비하였습니다. 30대에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때 너무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던 나는 어느 한 교회의 새벽 예배를 10일 정도 다니면서 “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 2개월 동안 계속 흡입하다가 어느 순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때엔 정말로 끊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도 안했지만 불고 싶은 생각을 뿌리치는 차원을 넘어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강박관념조차 안 생겼고 자유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내가 강박관념이 없게 되니 안심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이 자유롭고 평안했습니다.

   이래서 30대 중반에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업직이다 보니까 시장조사 등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3개월 정도 회사를 다닌 시점에서, 겨울이었는데 다른 동네에 영업하러 갔다가 외롭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3개월 동안 끊었잖아. 한번만 대고는 하지 않으면 되지”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보통 1주일에 3 ~ 4일 간격으로 계속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본드를 부니 자연히 일을 열심히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실적이 떨어지자 바로 크게 스트레스가 왔습니다. 결국 다시 흡입하게 되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1년 넘게 다녔던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단약을 성공하지 못한 이유.
 
   나는 습관적으로 했습니다. 짜증스러운 스트레스가 나를 하도록 몰고 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습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가 없이 혼자 있을 때조차도 타협하고 사용했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타협하는 여지, 작은 환경들을 체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깨진 환경을 돌이켜 살펴보니 그 중 하나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나는 예전에는 비트가 강렬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음악에 몰입되면서 슬픔과 기쁨에 젖었습니다. 기분이 업 되면서 약물을 안 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음악이 탁 들리면 바로 부는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중음악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음악은 나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음악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술도 이런 요소였습니다.

   환각이 보이지 않으면서 대체물로 대중음악을 들었던 것입니다. 환각과 함께 몸에 어떤 색다른 기분이 퍼졌던 것 같습니다. 보지 못했던 것, 레고가 사는 세상을 관찰자 입장에서 보는 그런 느낌, 그런 환각을 자주 보았습니다. 항상 관찰자 입장에서의 환각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각도 갈수록 희미해졌다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이 환각을 되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대중음악, 비쥬얼한 대중잡지, 영화 등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각에서 깨어나면, 항상 ‘왜 했지’하는 의심을 계속 가졌습니다.

재활의 길을 가다.

   교회에 나가 기도도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다시 들어가야 되나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징역은 살기 싫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TV에서 송천재활센터를 보시더니 연락처를 주셨습니다. 연락을 해보니,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 오게 되었습니다.

    재활센터에 와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취약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재활교육프로그램을 마치고 직업재활교육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을 따서 개인 사업이나 관련 업체에서 일하고자 합니다. 좋은 선택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나쁜 선택을 하면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지금 하는 공부가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믿음이 많아지면 지금 확신하지 못할 것들에 더 확신할 것입니다.

   단약에 대한 바람은 강력하지만 평생 단약을 한다는 것에 아직도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약물에 빠진 것도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선택한 것은 내가 한 것이지만 선택조차도 나는 좋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

댓글
0
이름 : 비밀번호 :
0 / 300

현재 페이지의 콘텐츠 안내 및 정보 제공에 만족하십니까?

확인
비밀번호 확인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