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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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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활센터에서 잘 자라는 콩나물처럼 우리는 변화하다 - 황병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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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천재활센터에서는 아침모임, 교육 및 운동, 역할활동, 저녁모임 등 일정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즉 허송세월하는 것 같아도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대부분 밑으로 빠져도 콩나물이 잘 자라듯이 우리 스스로가 매우 많이 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비록 자그마한 죄를 짓더라도 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졌고, 매일의 미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새로운 건강한 생활습관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때 매우 효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약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수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마초를 접하다.

   6.25전쟁이 막 끝날 무렵 경제적으로 좀 넉넉한 집안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서울의 한 명문 중학교에서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습니다. 명문 사학중의 하나인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과 운동을 잘하여 운동부에 들어갔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청강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청강생을 하면서 재수했으나 결국 원하는 대학 입학에 또 실패하였습니다.

   이런 대학생활을 시작할 무렵, 미군부대에 사는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담배 대신 대마초를 주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않는, 그렇게 피웠습니다.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에 의해 관리되는 시절로 대마초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때입니다.

   2학년을 마친 후, 입대하였습니다. 이 입대기간에 연예인들의 대마초 사건이 발생하여 대마관리법이 만들어지는 등 강력히 단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대 생활하는 동안에는 대마초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 한 다음, 동네 후배가 대마초를 주어 본격적으로 흡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1년 정도 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집에 재산도 있고 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업은 잘 되어 종업원 50명을 거느리는 사업체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대마초를 피웠으며 한 번도 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TV 뉴스를 통해 대마초로 구속되는 장면을 보게 되면서부터는 집에서 피우지 못하고 더 몰래 피우게 되었습니다.

   보통 하루에 3 ~ 4회 흡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폐해를 인식하지 못 했는데 훗날 생각해 보니, ‘점점 일을 미루는 습관이 생겼고, 나태해져 갔으며, 대마초를 하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만나는 생활 태도를 갖게 된’것 같았습니다.

히로뽕을 접하다.

   대마초 사용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대마초를 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 후배가 히로뽕을 권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고, 아마 대마초에 중독된
상태였기 때문인지 호기심이 생겨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히로뽕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않는 상태였지만 점점 더 마약을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에는 마약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그 후 5년 정도는 매일 마약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는 1주일이고 보름이고 매일 하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2 ~ 3일 정도 몸보신하면서 회복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또 10일이고 보름이고 하다가 몸이 좀 좋지 않으면 며칠 쉬다가 또 하고 하는 식으로 했습니다. 체중도 줄어들어 보통체중의 10여kg 줄었지만 그 선 이하로는 더 이상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연히 운영했던 회사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타격을 입어 갔고, 결국 처음으로 구속되자마자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지한 양이 너무 많다고 8월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2 ~ 3년 주기로 구속되는 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구속되기 전까지 집에서는 내가 마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뭔가 변했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점점 폭군처럼 난폭해져 갔고 더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워졌으며 뭔가를 핑계만 대는 모습을 보이는 등 자신을 생각하지 못했고 장기 계획을 보지 못하는 등 뭔가가 이상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사도 그대로 굴러 가지 내가 아니라고 펄쩍 뛰지 등등으로 구속될 때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단약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처벌을 받았을 때에는 집에서도 측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상처를 받을까봐 마약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석방된 나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경제적 도움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여 다시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예전에 그렇게 많이 하고도 살았는데’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마약의 길로 빠져 다시 구속되는 생활을 2 ~ 3년 주기로 되풀이했습니다. 이렇게 3번째 구속된 이후부터는 집에서도 나를 전혀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사업을 한다고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면 들어주었는데 그 이후에는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 구속될 때에도‘단약’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어떻게 하면 좀 더 은밀하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단지 재수가 없어서 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약을 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내 돈 주고 내가 쓰는 것인데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잃었는데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단약 노력했으나 실패하다.

   세 번째 구속되면서 처음으로 단약을 생각하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다시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이 집행유예기간에 수강명령으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처음 수강교육을 받았고 서울NA 창립에 힘도 보탰습니다. 당시 나는 말로는‘단약’을 달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집행유예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시 구속되어 1년 8월형을 받았습니다.

   내 자신보다는 내 주위사람들에게 마음 아파하게 한 것이 죄스러웠습니다. 교정시설에서 나를 철저히 다시 보기 시작 하였고 단약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단약을 하겠다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송천재활센터에 단약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부모의 형제들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매일 반성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단약의 힘을 길러갔습니다. 사회에 나가서도 어떤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재활을 위한 노력.

   교도소에서 나와 예전 마약을 하던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나는 이런 친구들에게 더 이상 마약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마약을 했어도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 지나자 친구들은 나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마약을 하지 않고 조심하게 되었으나 나의 철석같은 단약의 신념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쯤 해볼까’하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생겨났고 집에 돌아와서도 친구들이 약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가다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송천재활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 선배로 알고 지내며 중독에서 먼저 회복하여 송천재활센터 운영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임상현 목사님과 상의를 하고 나의 현 상태를 모두 진솔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무조건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는 운영팀장을 믿고 바로 재활센터에 입소하였습니다. 가족에게도 알렸습니다. 가족들도 내 단약의지를 진심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재활교육을 마친 후 바로 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약물상담을 공부하기 위해 이화사이버과정에도 등록하였습니다.

앞으로의 다짐.

   돈을 벌기 위한 사회생활은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아마 경제적인 이유로 또 사회생활을 한다면 실패할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마약을 시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써 단약에 성공하여 새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약물을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계획이고 소망입니다. 성공하는 모범을 보이고 싶습니다.

재활 성공은 가족과 종교 힘이 필요.

   젊은 사람들이 단약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약을 하는 사람은 항상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약을 했던 생각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약을 했던 장소와 한가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약 생각이 탁 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10 ~ 20%정도 밖에 되지 않다면 억제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 이것이 커질 수 있습니다. 이를 누르는 힘은 가족이고 신앙입니다.

   가족이 포기하는 경우 단약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가족을 위해서, 더 이상 이렇게 가다가는 나로 인해서 부모의 근심 및 자녀의 장래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는 늙어 가는데 더 이상 마음 아파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에게도 이제까지 기다려 주었는데 더 이상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가족의 힘이라고 봅니다.

   나의 경우, 어머니와 형제들이 마약을 하는 나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내 아내는 가족의 중요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인정하여 지금까지 있어왔습니다. 내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가족을 괴롭히고 할 때 동생은 자신의 형수인 내 아내는 우리 가족이자만 형인 나는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호적을 파고 나갈 사람은 나이므로 나가라고 요구하였다. 내가 약을 더 이상 못하게 하자 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에도, 부모와 형제들은 한 뜻으로 이혼하기 전에 오히려 나보고 집을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것이 가족의 결속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신앙 등이 접목되면 단약은 더 강화된다고 봅니다. 약을 했을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가 없었고 반응이 민감합니다.

   지금은 많이 자제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훈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7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2"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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