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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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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향기를 피우는 사람이고 싶다 -곽 병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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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외톨이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3살이고 형이 5살 때, 형이 동네 우물가에서 놀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엄마는 그 충격에 집을 나갔다.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매우 성실하게 일은 잘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매우 힘들어 하신다. 나도 아버지를 매우 닮아서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서툴고, 얼굴도 성형을 해야 할 정도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지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또 정말로 심하게 말썽도 부렸던 것 같다. 이런 것이 겹쳐 친구가 없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런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작은아버지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졸지에 아버지와 나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이 후 무척 외로움을 탔고 내 생활은 더 위축되었다.

관심을 준 친구들과의 만남과 빗나간 행동 그리고 처벌
공부를 못했던 나는 시골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 그 고등학교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 공부도 못하고 좀 불량한 학생들이었지만, 그 친구들은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매우 기뻤다. 그들이 무엇을 해도 나는 따라했다. 그렇게 그들로부터 담배를 배웠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담뱃불로 기숙사가 불이 났다. 내가 불을 낸 것은 아니지만, 무척 두려웠다. 그래서 집으로 도망쳐왔다. 집에서 1주일을 보낸 다음, 근처 도시의 한 전자오락실에서 우연하게 다른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 6명을 만났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 동해바다로 가서 폭주족 생활을 하였다. 그들 중에는 본드를 하는 아이, 가스를 부는 아이도 있었다. 하루는 약물을 하는 아이가 나에게 권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몇 번이고 더 권했다. 마지못해 시험 삼아 불어보았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 즉시 친구에게 “진작 권하지 지금까지 무엇했느냐?”고 오히려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그 이후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도 이따금 불었다. 이런 생활을 6개월 정도한 다음, 그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가스를 불었다. 몇 달 후, 그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한 친구가 내 모습을 보더니 더 이상 불지 말고 살길을 찾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그 말에 멍했지만 “너나 신경을 쓰라.”고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날 중국집에서 시킨 볶음밥을 먹으면서 오바이트를 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계속 그런 생활을 하던 중, 한 친구가 찾아와서는 담배보다도, 가스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다면서 권했다. 대마초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심은 대마 밭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다. 기분이 뿅 갔다. 그들과 계속 어울리면서 대마초까지 하였다.
그 후, 그 친구들과 함께 다시 동해바다로 가서 폭주족 생활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의 돈을 갈취하면서 생활했다. 동해바닷가 도시들을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조사를 받았다. 결국 한 친구가 지금까지 절도한 것을 다 불었다 .나에게도 누명을 씌어 공범이 되었다. 결국 14개월간의 소년원생활을 하였다.

허송세월
소년원생활 13개월째 한 번도 면회 오지 않았던 아버지가 면회 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다. 정말로 하늘이 노래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장손자인 나를 위해 해주셨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내 뇌리를 지나갔다.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소년원에서 자동차정비사자격증 2급을 땄다.
소년원에 나와서, 아는 분의 소개로 한 공업사에 취직을 했다.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던 나는 자주 농땡이를 쳤고 쓸모없는 말도 많이 했다. 2-3일에 한 번씩 공업사에 오던 한 사람이 나의 모습에 화를 내었다. 나도 모르게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나와 휘둘렀다. 결국 한 달도 못되어 직장에서 쫓겨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는 일 없이 술 먹고 자는 일만 되풀이하면서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이천의 버스터미널근처의 한 오락실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소년원에서 함께 있었던 친구였다. 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는 그 친구들과 함께 수원의 목욕탕 겸 안마시술에서 갔다. 그곳의 주인이 나에게 구두닦이와 때밀이를 배워보라고 얘기했다. 그곳에서 1년 넘게 이를 배우며 생활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쉴 때는 그 친구들과 함께 남의 물건을 손대기 시작하였다. 나는 보통 망을 보고 절도 짓을 잘하는 친구들이 절도를 했다. 그렇게 생긴 돈으로 게임방 등을 오가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후에도 노숙자쉼터에서 2년 정도 생활하다가 집에 내려갔다가 친구 집에 갔다가 일이 생기면 몇 개월 정도 일하다가 돈이 생기면 다시 오락실에서 오락하던지 하면서 돈을 쓰고 나면 무일푼이 되고 다시 쉼터와 같은 곳에 들어가 생활하는 연속이었다.
나는 그런 속에서도 정말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건설현장에서 배관설비 업무를 보조한 적도 있고 피자를 배달한 적도 있으며 발코니 공장에서도 일한 적도 있고. 농장에서 돼지를 키운 적도 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둔 적도 있지만, 주로 사업장이 폐쇄되거나 임시직이어서 중단된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의 가치를 몰랐고 관리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살기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모은 돈이 없다. 말을 많이 더듬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지 못해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고, 또한 갑자기 욱하는 성격도 있어서 설령 좋은 관계가 있다가도 의를 상하기 일 수였다. 이와 같은 사회성 부족과 얼굴 콤플렉스가 결합되어 직업을 잡기도 힘들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제 얼굴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예전에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어머니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 방송을 보신 한 의사께서 얼굴을 수술해주셨다. 지금도 계속 1-2개월에 한 번씩 그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정말로 감사드린다.
지금은 약물 생각이 없다. 나에게 약물은 아마도 친구를 사귀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제빵 공부를 하고 있다.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좀 더 숙련된 사람이 되고 돈을 벌어서 빵과 피자를 파는 가게를 하고 싶다. 내가 직접 만든 빵과 피자를 팔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 나와 같이 부족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작지만 사회에 아름답고 향긋한 향기를 피우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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